기획자의 서랍

스타트업신에 N사 출신 개발자가 CTO가 되면 생기는 일

푸른은하 2023. 2. 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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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떠나며 지난날을 회고해 본다.

헤드헌터를 통해 3명의 CTO 면접이 있었다. 

나는 면접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면접에 들어간 다른 두 개발자들(지금은 다른 회사의 CTO이자 슈퍼개발자들)은 협상 연봉이 가장 높았지만 더 욕심이 나고 일을 잘할 것 같은 개발자을 CTO로 뽑자고 했다. 

하지만 대표의 선택은 달랐다. 대외적으로 홍보하기 좋은 학벌과 과거경력 그리고 적당한 연봉협상금액이 가능했던 A를 뽑았다. 
빠르게 투자유치를 진행해야 했던 대표가 얼마나 많을 고민을 했을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새로 부임한 CTO는 난생처음 보직을 맡아보면서 혼자 상상하던 것들을 시전 하기 시작했다.
하기사 그의 지원사유가 스타트업에서 한번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어서였다고 하니, 우리 회사는 그의 도전의 발판이 된 샘이다.

우리 회사가 아니라면 달아보질 못했을 CTO라는 타이틀이 A는 얼마나 자랑스럽고 마음에 들었을지 상상이 된다. 치열한 스타트업신에서 혼신을 다할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스톡옵션은 안주냐는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맞는 말이다. 지분이 있어야 더 열심히 할 것이다. 스톡옵션은 스타트업신에서 서비스를 성공시키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그들의 피와 땀 대신에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증명되지 않은 서비스를 증명하는 잉고의 과정을 지나 그걸 대박치고 그 과정을 함께한 사람들이 나누는 것이지 그냥 그냥 발가락 담그고 있던 사람들이 가져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A에게는 성공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는 말은 있었지만 행동의 일치는 느껴지지는 않았다. 출근을 해서 다른 팀과 팀워크를 높일 생각도, 야근을 해서라도 일정을 맞춰 서비스를 출시해야 한다는 마음도 없다는 것이 그의 요구사항과 대화에 녹아 있었다. 그냥 CTO 놀이를 하면서 스타트업에서의 혜택만 챙겨가고 싶은 사람으로만 보였다. 부디 내가 잘못 본 것이길 바란다.


개발팀 세팅이 들어갔다. 그래도 어떻게 해야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던 A는 당장 필요한 인력보다 더 많이 사람을 계속 뽑았다. 그동안 개발인력에 목말라 있던 대표는 A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기 시작했다. A의 요청으로 강남에 사무실을 구했지만 이러저러한 핑계로 재택근무를 유지했다. 2주에 1회 출근을 할꺼라면 왜 강남에 사무실을 구했나... 한숨이 나온다... 대표님은 아마도 더 많은 개발인원이 우리의 서비스를 더 빨리 로켓 발사대에 올려 줄 수 있을 꺼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회사 매출을 뻔하게 알고 있던 나는 혼자 매일 야근하면서도 필요한 팀 인력을 뽑지 못하고 미루고 있었다. 시니어기획자 1명과 주니어디자이너 겸 기획자 1명으로는 기존 서비스 운영도 벅찬 상황에 새로운 리뉴얼을 진행 기획해서 새로 입사해 놀고 있는 개발자들을 감당하기에는 역시 역부족이었다. 

CTO로 A가 입사하고 약 6개월이 흘렀고 개발팀 빌딩에 집중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난 이때 이미 2년 가까이 너무 많은 것을 혼자 감당하던 나는 피로감이 쌓여 있던 상황이었다. 돌아보면 이때 판단력이 흐려져 있었던 것 같다. 대표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외부의 상황도 코로나 팬데믹에 모여서 일하기도 힘들고 스타트업 투자는 점점 얼어붙어 가는 상황이었다.

한발 늦기는 했지만 리뉴얼과 서비스 성장을 위해서 우리 팀도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도 기획자도 귀해진 상황이라 마음에 드는 친구들을 뽑으면 입사하기 전에 더 좋은 회사의 입사 제의를 받아 입사취소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한숨만 나왔다.

그러는 사이 A의 계속되는 기존 개발코드에 대한 불만과 당연한 일을 자랑하는 시전들.. '너를 뽑은 이유가 그런 거 정리하라고 뽑은 거야 입사해서 놀생각이었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기획에 대한 불만들 나에 대한 불만... 자기 다니던 N사에서는 이렇게 일 안 했다는 레퍼토리는 정말 듣기 지겨운 수준이 되었다. 나도 N사 다니고 K사 다닌 너보다 잘난 개발자들과 일했지만 너처럼 일하지 않더라. 그렇게 대기업이 좋았으면 왜 이직했냐? 여기가 대기업인줄 아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난 그럴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과연 협력이라는 것은 해본 적이 있을까라는 꼬리표가 모든 대화에 붙여졌다.

말빨로 입사했기에 말로 일을 했고 들어보면 결국은 자기는 잘할라고 하는데 기획팀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 말인즉 지금 놀고 있다는 말로 들려서 야근을 밥 먹듯 하며 막상 기획요구사항을 전달하면 개발은 준비하는데 한 달 정도 일정을 잡았다. 나는 하루에서 일주일을 예상했던 것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지고 늦어졌다.

A와 비슷한 부류의 개발자들로 채워진 개발팀은 대응이 점점 어려운 수준이 되어 업무 커뮤니케이션은 늘 고도의 긴장 상태가 되었다. 내 기획자 생활 15년 동안 생전 처음 만나보는 유형의 개발자들과 일을 하게 되었고 어찌 감당해야 할지 답이 안 보이는 상태였다. 난 해결책을 찾기 위해 요구사항들을 맞추고 책을 읽기 시작했고, 개발팀은 대표님께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투덜 거림이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이러한 네거티브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상황까지 대표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팀워크를 맞춰가는 상태에서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했고 우리도 팀원이 채워지면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나만의 이상이었고 큰 착각이었다.

그러던 사이 대표님은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의 근원이 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와 새 CTO가 너무 다른 성향이지만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를 부드럽게 풀어야 할 주체는 나에게 있다고 이야기했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고 생각했다. 내가 주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위치는 맞지만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의 문제가 아니다. 쌍방의 문제인 것이다. 나만 노력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로 심한 스트레스와 탈모를 경험해야 했다. 

그 사이 3개월간의 치열한 면접 끝에 기획팀도 인원보강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3명을 채용하고 온보딩을 빠르게 진행하고 2개월 차부터 바로 리뉴얼준비를 들어갔다. 일이 없어 한가하면 말이 많아지고 딴짓을 한다. 개발팀은 일을 엄청 쌓아줘야 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렇게 약 1 달반 정도 리뉴얼 준비를 했고 개발팀 시안 공유미팅을 잡았다.

그런데 대표님으로부터 공유미팅을 취소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다음날 사무실에서 보자고 한다. 무슨 일 때문일까 몇 가지 상상을 해본다.

그날 저녁 마침 읽고 있던 책 인스파이어드(마티 케이건)를 다 읽었다. 케이건이 말하는 혁신을 잃게 되는 상황에 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안티 패턴(anti-pattern)

혁신을 잃게 되는 상황 - 인스파이어드 347p

대부분 조직이 성장하면서 빠르고 지속적으로 혁신을 창출하는 역량이 감소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 확장에 따른 구성원의 자질, 프로세스, 커뮤니테이션 이슈라고 생각한다.

혁신을 잃게 되는 상황 - 인스파이어드 348p

처음부터 리더에 대한 기대사항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새로운 리더들은 그들이 채용되는 이유가 프로세스에 대한 경험과 제품을 정의하고 실행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 때문이라고 해석해 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일하는 방법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그대로 들고 온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보통 이전에 일했던 업무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을 채용하는 것이다.

혁신을 잃게 되는 상황 - 인스파이어드 349p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전 회사에서 나쁜 실행 방법들을 가지고 오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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